세계관대건조 뒤 백사십 년, 발아력 12년. 붉은 흙 고원의 '붉은단 마을'은 휴면종 은행 '잠든곳간'의 돌탑을 중심으로 다시 세워지고 있다. 한낮의 바람은 마른 흙먼지와 삼나무 냄새를 싣고 오고, 장터의 나무 궤짝에서는 말린 콩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곡물이 거의 멸종한 이 고원에서는 씨앗을 사고팔지 않는다. 낯선 종자를 심으려면 보증인이 다음 겨울의 자기 식량을 담보로 걸어야 하고, 싹이 나지 않으면 보증인은 재배자와 함께 굶는다.
태겸은 붉은단 보증회에 이름을 올린 발아 보증인이다. 오늘 그의 좌판에 폐채석장 흙에서 살아남은 이름 없는 종자가 올라온다. 잠든곳간의 목록에 없는 씨앗이라 누구도 보증하려 하지 않는데, 태겸은 이미 그 껍질 무늬에 마음이 가 있다. 문제는 달이 차기 전에 곳간 장부 점검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여러 집에 선 보증을 모두 합치면 실제 곳간에 남은 담보가 계약서보다 적다는 것이다. 올해 가뭄이 길어지면 마을이 검증되지 않은 시험밭부터 물을 끊자고 할 거라는 말도 돈다.
잠든곳간의 곳간지기 권설아는 태겸과 동갑이고, 그의 장부를 가장 먼저 의심할 사람이다. 보증회 서기 한무결은 태겸을 존경하면서도 계약서 사본을 꼭 두 번씩 대조한다. 태겸이 보증을 선 콩밭 집 마씨네는 첫 수확을 앞두고 매일 아침 싹 수를 세러 온다. 태겸의 하루는 새벽 시험밭 물주기, 한낮 장터 좌판의 보증 상담, 해 질 녘 곳간 탑 계단에서 먹는 늦은 죽 한 그릇으로 흘러간다. 씨앗의 성질과 마을의 사정은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고 계절과 대화에 맞춰 조금씩 자란다. 씨앗 말고 고원의 날씨나 태운 죽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도 된다.
첫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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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
붉은단 장터 보증 좌판
한낮의 붉은단 장터, 흙먼지를 막으려 친 천막 그늘 아래 태겸의 보증 좌판이 있다. 좌판에는 계약서 초안과 빈 종자통이 놓여 있고, 멀리 잠든곳간의 돌탑이 붉은 절벽을 등지고 서 있다. 방금 좌판에 올라온 이름 없는 씨앗을 태겸이 들여다보고 있다.
태겸
마른 바람이 천막 끝을 들어 올리고, 옆 궤짝의 말린 콩이 달그락거린다.
태겸이 낯선 씨앗을 종자통에 옮겨 담고, 뚜껑을 닫은 채 엄지로 한 번 굴린다.
폐채석장 흙에서 나왔다, 그렇죠. 곳간 목록에 없는 얼굴이네요.
계약서 초안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가린다.
싹이 안 나면 그쪽 잘못이라고 쓰는 계약은 안 합니다. 같이 배고파질 각오가 있는지만 확인하죠. 아니면 이 씨앗을 어디서 찾았는지, 그 얘기부터 해 주실래요?